Hendrick Hamel

헨드릭 하멜은 1630년 호르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Dirck Hamel과 G. Verhaer였으며, 부친은 요즘에는 보기 드물게 세 번 결혼했었다. 1650년 11월 6일, 그는 Texel(네덜란드 북부에 있는섬)의 Landdiep에서 Vogel Struijs (타조란 뜻)호에 승선하여 인도로 향했다. 1651년 7월 4일 그는 바타비아 항에 도착했다
Vogel Struijs 호 승선 명부에 하멜은 사격수를 뜻하는 Bosschieter 로 등록되어 있었다. 분명하게도 그와 같이 언급되어 있는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보면, 후에 장관인 Wiese도 인도로 가는 항해 명부상에 보통선원을 뜻하는 hooploper 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Wiese는 당시 장관이었던 Van der Parre의 조카였다.
인도에서 하멜은 빠르게 승진했다. 그는 서기에 이어 보좌관이 되고 1653년에는 장부 계원이 되었다. 장부 계원의 업무는 선박의 항해 유지와 재무 관리는 물론 재정을 맡아 보는 것이었다. 서열상으로는 키잡이와 동등했다.
7월 18일 하멜은 이런 임무를 띄고 대만으로 가는 도중에 Sperwer 호에 승선해 Batavia 를 떠났다. 배는 무사히 아무런 사고없이 1653년 7월 16일 대만에 도착했다. 배는 Batavia 를 다소 늦게 떠났는데, 그것은 대만에 근무할 네덜란드 에서 오기로 해 야 했던 많은 군인들을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네덜란드에서 도착하기로 한 군인들을 헛되이 기다린 후에 Sperwer호는 군인들없이 대만으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순항은 거의 끝날 때까지 계속 되었다.

바타비아에서 대만으로 가는 항로에서 날씨는 아직까지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날씨는 화창했고 항해는 순조로웠다. 표류기 에는 대만에서 나가사끼로 가는 두번째 항해 때 약간 순탄치 못했다고 알려져 있다. 후에 우리가 결론내린 바로는 하멜과 그의 일행들이 겪게되는 일들은 바타비아에서 늦게 출발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Sperwer호의 실종사실이 공식화 되자 총독인 Joan Maetsuyker는 중국과 일본해 사이에서 그날 이후 발생할지 모르는 폭풍과 관련해 7월 1일 이후로 대만 북부해협으로 배를 보내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하멜과 그의 일행이 대만을 출발해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은 표류기 에 광범하게 묘사되어 있다. 표류기의 저자가 헨드릭 하멜인지 아닌지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듯한 것이 그러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은 바로 장부 계원의 일이라는 것이다.

하멜은 표류기에서 자신을 제삼자로서 말하고 있는데 그 당시로서는 흔한 일이었다. 또한 하멜은 표류기에 서명을 하지 않았는데 그 당시엔 흔한 일이었다. 보고서는 글쓴 사람에 의해 서명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 당시의 거의 모든 기록들은 하멜을 저자로 간주하고 있다. 거기에도 의심할 여지가 거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점은 그가 언제 표류기를 썼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데시마에 강제로 머물러 있던 기간동안 일어난 일들로 알 수 있다. 하멜과 그의 일행들이 조선에서 운좋게 탈출한 뒤 이미 그들은 1666년 10월 23일 Esperance 호로 바타비아로 떠나길 희망했다. 그러나 그들은 허가를 받지 못했고 데시마에서 일년을 더 지내야 했다.

2년후인 10월 25일 심문이 있었다. 이 심문은 하멜과 그의 일행이 조선인 어부의 배로 나가사끼에 도착한 날인 1666년 9월 14일로 되어 있었다. 그러면 심문이 이미 행해졌음이 분명하다. 통역관은 포르투칼어를 할 수 있는 네덜란드인과 일본인 두 명이었다. 그로 인해 심문은 그 날의 가장 큰 행사였고 하멜과 그의 일행은 그날 저녁, 데시마섬으로 이어진 다리를 건넜고 상관과 VOC의 직원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일본인들의 그 ' precisiteyt ' (꼼꼼함)으로 유명했던 심문과 답변은 일본에서 복사되어 10월 25일 또다시 두명의 통역관의 도움으로 하멜과 그의 일행에게 큰소리로 읽혀졌다. 그러던 우연한 기회에 9월 14일, 10월 25일, 하멜은 심문내용을 복사하거나 기록할 기회가 있었다. 좀더 명확한 가능성으로는 VOC 통역관이 기록했었을 수도 있다.

1666년 10월 18일짜 상관장의 보고서에는 Volger씨가 정박을 하고 이미 Esperance 호에 승선했을 때 Sperwer 호에서 난파된 이들의 일들이 기록되었어야 한다고 총독에게 썼다. 하멜은 출발전에 보고서 작성의 의무를 띄고 있었던 듯 하다. 하멜이 표류기 를 작성하는 동안 자신의 임의대로 기록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는 수많은 장소와 날짜를 언급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가 조선에서 일기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반면, 그가 일기에 의해 표류기 를 썼을 경우 기입했을 정확한 날짜를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 그가 임의대로 기록을 했다면 매우 간결했을 것이다. 하멜은 표류기 를 쓰는동안 자신이나 동료들의 기억에 의존했음에 틀림없다. 다음해인 10월 22일 떠나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을 때 하멜은 오랫동안 썼던 표류기 를 끝마쳐야 했을 것이다. 그날 헨드릭 하멜과 그의 일행은 출항준비를 마친 Spreeuw 호에 승선했다. Batavia 로 돌아가는 항해는 Formosa 를 경유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 섬이 1662년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해 Zeelandia 요새는 Ming왕조의 후손들에 의해 정복당했다. Spreeuw 호는 10월 23일 심해를 택하고 11월 28일 Batavia 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Joan Maetsuyker의 일일 보고서에 따르면, Journael 이 Joan Maetsuyker에게 전해졌다고 했다.
하멜의 일행은 Batavia 에 도착했던 것과 같은 배를 이용해서 조국으로 항해했다. 그리고 1668년 7월 20일 조국에 도착했다. 그러나 하멜은 인도에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서 네덜란드 에 대한 항수가 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Hague 주 문서국에 있는 그 원고는 면밀히 검토한 바에 의해 하멜이 기록한 원문으로 생각되어지고 있다. 원문은 Batavia 문서국용으로 필사본이 만들어지고 난 후에 총독에 의해 네덜란드로 보내졌으나, 사본은 소실되었다.

표류기 에서 두드러진 점은 하멜이 그와 그의 동료들이 언제 바타비아로 떠났는지 그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지만, Spreeuw 호가 언제 Batavia 에 도착했는지는 빠져있다. 하멜은 난파선에서 살아남아 구조된 두 번째 생존자들과 함께 1669년 Holland 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배는 다시 수리되지 않았다. 1670년 8월 하멜은 두 번째 생존자들 중 2명과 함께 Heeren 17세 앞에서 조선에 감금되어 있는 기간동안 받지못한 임금에 대한 지불을 요구한다.

동일한 요구를 첫 번째 생존자들도 했었다. Heeren 17세 는 이들의 요구를 거절했고 1670년에도 거절했다. VOC의 직원들은 VOC의 배에 승선하고 있었을 때나 공장에서 일했을 때 임금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Heeren 17세가 만든 이 규정은 피해갈 수 없는 힘겹고 엄격한 규칙이었다. 그러나 인간적인 면을 고려해서 그들은 Sperwer호에서 살아남은 모든 직원들에게 일정한 액수의 돈을 주기로 결정했다. 이 액수는 그들이 조선에서 13년간 머물러 있는 동안 받아야할 전체 분량에 미치지 못했다. VOC는 자선단체가 아니라 무역회사였던 것은 분명했다.

그 이후 하멜의 생활은 조선에서 머물기 전 만큼이나 알려지지 않았다. 1734년경 호르컴에 보관되어 있는 손으로 쓴 문서에는 하멜이 1670년 호르컴에 정착했다고 씌여있다. 수년후에 하멜이 정확히 언제 인도로 다시 떠났는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인도체류에 대한 어떤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1690년이나 그보다 더 일찍 하멜은 호르컴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692년 2월 12일 "vrijer zijnde " ( 여전히 미혼인 상태 )로 사망했는데, 그의 나이 62세였다.


추가적인 조사에서 알 수 있는 것들.

한편으로 하멜에 대한 기억을 할 수 있게 하는 이정표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호르컴 : 헨드릭 하멜의 거리
1930년 7월7일 이후로 Linge 거리에 소재.
호르컴 : 하멜과 그의 동료들이 살았던 강진(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상이 세워 짐.
nr 65 구내옆의 Kortedijk에서 태어난 헨드릭 하멜에 대한 경의로 생겨났다.
Heusden(흐스든) : 하멜 공원
1500년경에는 시장출신의 하멜이 여럿 있었는데 그들은 헨드릭 하멜의 선조였다.
The Hague(헤이그) : 헨드릭 하멜의 거리
Heusden : 헨드릭 하멜 공원
1630-1692년 까지 최초의 서양인 조선 전문가.

Hendrick 과 Hendrik은 같은식으로 사용되었는데, 표류기 원문에는 Hendrick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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