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 Janse Weltevree

도입부에서 소개한 Jan Janse Weltevree는 불가사의한 인물로 불린다. 그가 언급한 원문을 비교해봐도 설명하기 힘든 상반됨이 있다. 예를들면 하멜은 그의 표류기 에서 그의 동료들과 1656년 한양근처 한강 건너 나룻배에서 Weltevree를 마지막으로 보고 다시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썼다.
같은 일이 나가사끼에서 있었던 심문에서 요구되었다. Weltevree가 살아있느냐는 일본의 질문에 네덜란드인들 은 그를 10년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모른다고 대답한다. 이것은 그럴듯 하게 들리지 않는다. 조선전역을 자유롭게 다닐수 있는 Weltevree가 그간 10년동안 자기네 사람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기 위해 남쪽으로 한번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 정말일까?
더욱이 표류기 에 따르면 일종의 우편수단이 있어서 전갈을 보내는것이 가능했었다. 한양에서 통역관 역할을 해야했던 3명의 동료가 그들이 남쪽에 붙들려 있음을 서신으로 알렸다고 한 사람은 결국 하멜이었다.
또 하나 제기되는 의문점은 1656년 이후로 Weltevree와 다른 네덜란드인들 과의 접촉이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의문점은 데시마 재외상관장의 일일 보고서에서 그 사실여부가 명확해지는데, 하멜은 상관장에게 심문이 있었던 같은날 Weltevree가 하멜과 그 일행이 떠날 때 살아있었고 약 70세 였다고 말하고 있다. 하멜이 일본이나 상관장에게 거짓말한 것일까?

또한 Weltevree가 1627년 조선인에게 붙잡혔던 상황을 볼 때,여러 자료들은모순되는 점이 있다. 그러나 1667년의 부산의 기록에 따르면 벨 타브레가 경상도의 경주에 붙들려 왔었다고 한다. 이 기록이 다른 세부사항에서도 정확하며 벨타 브레는 이 사실을 인정했다. 따라서 우리는 벨타브레가 경주에 붙들려 왔다고 봐야 한 다. 표류기 에는 Weltevree가 조선해안에서 좌초할때 Ouwerkerck 호에 승선하고 있었다고 적고있다. 여러 동료들과 함께 그는 물을 가져오기위해 해안으로 노를 저었다. 그러는 동안 이들은 Weltevree와 두명의 동료를 붙잡은 조선인들에 놀라서 나머지는 가까스로 달아났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데시마 상관장의 일일 보고서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여기에는 Weltevree가 Ouwerkerck에 타고 있지 않았다고 쓰여 있다. 어느날 이 배의 선원들이 중국선박을 민영화했는데 Weltevree는 이 배를 대만으로 가져가기 위해 다른 네덜란드인들과 함께 배에 올랐다. 폭풍으로 배는 조선해안에 다달았다. 여기에서 세 명의 네덜란드인들은 중국인에게 압도당해 조선인에게 건네졌다. 이 사실은 1627년 7월 22일 Formosa 의 장관이 Batavia 상관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확인되었다. Formosa 장관은 7월 16일 Amoy로 가는 도중에 Ouwerkerck이 중국상선을 민영화했다고 발표했다. 150명중 70명의 중국선원들이 Ouwerkerck 으로 옮겨간 반면, 16명은 나머지 중국선원들과 함께 대만으로 가기 위해 상선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상선은 폭풍으로 북동쪽에서 표류했고 그 후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봐서 좌초의 우려가 있다. Ouwerkerck호 는 몇달후에 포르투칼선에 의해 민영화되어 마카오에서 불태워졌다. 요트는 조선해협에 도달한 적이 없었다. 위의 언급으로 봐서 벨테브레는 Hollandse 사략선(私掠船)무리에 인질로 붙잡혀서 조선인에게 건네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하멜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이 불미스런 일을 표류기에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해할만 하다. 그리고 일본인이 심문할 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분명하지 않는 것은 그가 왜 Hollandse 과 심문과정에서 10년간 벨테브레에 대해 들은 바가 없다고 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멜이 벨테브레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들이 더 있다. 표류기의 한국어판 번역자인 이평도씨는 증간판에서 1700년도 자료에서 벨테브레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고 인용하고 있다.:

  연은 신장이 크고 약간 체중이 많이 나가는 체격이었다. 그는 푸른색 눈에 창백한 얼굴 그리고 복부까지 늘어트린 턱수염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조선여자와 결혼해서 1남1녀를 두었다.

문서 작가의 부친과 삼촌이 벨테브레가 있을 당시 조선 조정의 고위관직으로 연을 맺고 있었서 한 가지 추측가능한 것은 그 문서가 믿을만 하다는 것이다. 만약 벨테브레가 부인과 아이들이 있었다면, 하멜이 몰랐을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 문서는 하멜과 다른 네덜란드인들이 한양에 머무를때 그를 방문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하멜은 표류기에서 이 흥미로운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아마 하멜은 벨테브레의 혼인상태에 대한 언급이 네덜란드에도 부인과 아이들이 있는 다른 대부분의 네덜란드인들에게 골치거리 질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이평도씨가 인용한 다른 한국어 문서에도 벨테브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연은 구인후 대장 진영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의 아들들이 훈련도감 등록명부에 언급되어 있다.
이 인용문에서 주목할 점은 '아들들'이란 말인데 벨테브레는 아마 한명 이상의 아들이 있었던 것 같다. 여기에 인용 언급된 훈련도감은 16세기 말에 무기 생산과 이의 사용법을 훈련 시키기 위해 조정이 설립한 군사훈련기구였다. 등록명부에는 대포의 제조법과 같은 전문 분야에 종사하는 기술자들의 이름을 제한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이런 직업은 대를 물리는 것이었고 다른 문헌에서도 벨테브레는 한양에서 무기제조 책임자였고 이 분야에 전문가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전인용문이 유래된 한국어 문서에서 이를 읽어 볼 수 있는데 아래와 같이 나와 있다:

  연은 무기지식 분야에서 전문가였다. 그는 대포주조에 매우 뛰어났고 마무리 손질은 아주 훌륭했다.

이 문서에는 Sperwer호의 난파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효종4년(1653) 이상한 배 한척이 진도해안에 좌초되었다. 배에는 36명이 승선했다. 그들은 두드러진 옷자림에 신장도 월등했다. 얼굴에 대해 코도 높았으며 눈은 깊게 패어 있었다. 그들은 우리 말이나 글을 알지 못했다. 조정에서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박연을 내려 보냈다. 박연은 이들을 보고 매우 감격해했다. 그의 수염은 눈물로 젖었다. 그는 그들이 자기네 나라 말을 하는 고향사람들이라 말했다. 그래서 왕은 박연을 통역관으로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수년간 이들은 우리나라에서 살았다. 그들은 무기제조 기술과 그에대한 풍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도 내, 외곽에 자리한 수비대에 편입되었다.
그들이 우리와 지낸지 14년째 되던해에 그들중 8명이 머무르던 남쪽지방에서 어부의 배를 타고 탈출했다. 그들은 나가사끼에 도달했다. 나가사끼 장관은 국왕에게 그들이 일본의 속국인 Haranda (네덜란드)사람이라고 서신을 보냈다. 그래서 그는 조선의 국왕에게 나머지 네덜란드인들을 나가사끼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그렇게 된 것이다.

하멜과 그의 동료들이 지니고 있었던 무기제조와 그에 대한 많은 지식은 그가 표류기에서 밝히고 있는 것들 즉,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구걸을 해야 하는 등 모든 사소한 일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VOC선에 승선했던 이들은 주로 대장장이 이거나 도구만드는 이들로 총과 25-30문에 해당하는 대포를 간단히 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정 필요한 경우에는 누구나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어야 했다. 대장장이가 빵을 굽기도 했다. 이들 모두는 아마도 무기를 다루는 법과 조립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벨테브레는 이 분야에서 더 전문적인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던것 같다. 그러나 조선은 무기산업이 그리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장님나라에서 외눈박이였을 것이다. 조선은 중국에서 대포를 수입한 듯 하다.

Nicolaes Witsen Noord en Oost Tartarije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Snaphaunces은 그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들은 신관이 달린 조총을 사용한다. 게다가 그들은 손가락 두께의 절반쯤으로 안쪽 동판에 맞는 가죽조각으로 된 포를 사용한다. 가죽은 검지와 새끼손가락 두께로 여러겹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포는 한말에 두개씩 말등에 얹혀서 군대 후미에 운반된다. 이런 대포로는 비교적 큰 포탄도 발사할 수 있다.

1760년 부터 1839년까지 생존했던 조선인 작가 송행은 역사상의 평론에서 네덜란드인 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난파선의 생존자들 중에서는 포에 대한 전문가도 몇명 있었다. 그들은 배에 30문 정도의 대포를 가지고 있었고, 모두 바퀴가 달려있어서 쉽게 운반이 가능했다. 포가 한발 발사되면 대포는 배 뒤쪽까지 굴렀다. 그래서 뒤로 반동하는 힘이 가해져 몸체가 쪼개지는 것을 방지했다. 그들의 소통역시 정교한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철끝을 부싯돌이 내려치는 원리로 불꽃을 일으켜 화약이 발사된다. 이것은 걸쇠를 잠그고 끌르는 스프링 작용으로 일어난다.

전문가에 따르면 네덜란드인들 은 miquelet 안전장치로 알려진 머스켓총을 사용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1957년 뉴욕 Harper에서 발행된 Robert Held가 쓴 The age of fire arms, a Pictorial Study 에 보면 이 무기에 대 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miquelet은 간단히 말해 snaphaunce같이 딱 소리 내는 발사장치로 선단에 L자형의 경첩을 단 발화판 덮개로 결합된 기발한 모양에 정교한 장치였다. 수직부위는 부싯돌로 치고 수평부위는 발화판 덮개를 형성하고 있었다. miquelet총을 쏠려면 반공이를 위로 젖히고 압력없이 짤깍 소리내며 공이를 놓는다. 발사하기 위해서는 공이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하고 방아쇠를 잡아 당긴다. 하지만 낡거나 흠이있는 공이는 소지 하는동안 '반쯤 뒤로 젖혀짐'이라하는 예기치 못한 사태를 가져온다.

이 같은 머스켓총은 16세기 말에 스페인에 의해 발명되었고 네덜란드인들 은 이것을 언제 사용했는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Nieuwpoort전쟁이 있은 1600년에 Maurits 군주의 군사들은 이미 이것으로 반격했었다.
위에 언급된 점으로 보아 제조술과 총기에 관해서 조선인들은 네덜란드인들 에 비해 훨씬 뒤쳐져 있었다. 그들은 기꺼이 네덜란드인들 의 지식을 이용했다. 그들이 왕의 호위대로 임명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송행은 난파된 Sperwer 호에서 가져온 모든 총기류는 한양으로 옮겨 졌다고 적고 있다. 거기서 그것들은 '훈련도감'에서 온 사람들에게 조사받았다. 그 후로 네덜란드인들 은 그들의 지식을 전수했다. 청사신과의 작은 사건이 있었을 때 조선인들은 네덜란드인들 을 죽이자고 했다.
그대신 그들은 조선의 남쪽 지방으로 쫓겨났다. 그 후로 그들은 하찮은 일과 심지어 구걸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몇몇 행정관들이 잘 대해주고 가능한 자유롭게 해준 것은 운이 좋아서였다.
하멜은 심문에서 한양에 있을 때 조선인들에게 현대식 무기의 사용법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말하는것이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하멜은 또한 해안에서 몇정의 총만 건질 수 있었고, 이런것들도 그나마 심하게 손상됐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물속에 단기간 있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있다. 조선의 문헌에서 볼 때 난파된 배에서 건진 모든 무기류는 한양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벨테브레에 대해 알려진 것들로 볼 때 일본인들의 의문점은 Sperwer호의 선원들도 중국상선을 소유할 수 있었던가 하는 것인데, 이에 대한 하멜의 답변은 예상했던 대로 그들은 그럴 자격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Heeren XII세 는 모든 선장에게 다른 국가사이에서 행해지는 무역에 대해 방해하고 그들의 배와 짐을 압수할 수 있게 했다. 압수된 배에 대해서 선장과 선원들은 대가를 받았다.

거기에는 하루를 참을수 없을 정도의 명령도 있었는데 예를 들면, 물을 짊어지고 나르는 것이다. 이런 일에 대해 선장들은 기꺼이 무인도에서 받아들여졌다. 물을 옮겨가는 정해진 장소가 있었지만 폭풍과 역풍으로 사람들은 다른 해협으로 항해했다. 명령서에는 배는 해안에서 안전한 거리에 닻을 내려야 하고 범선의 선원들은 충분히 무장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섬뜩한 구절도 있었다; "야만인이 보이면 즉시 죽여야 한다.".
7도의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VOC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배를 약탈하고, 야만인에게 발포를 하는 것과 같은 전시행동 권한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들은 희망봉 동쪽에서만 이런 행동이 허용되었다.


다음과 같은 중대한 발언을 한 Wim Hamel의 빈틈없는 일 때문에 우리는 아래의 몇가지 의문점을 가지게 된다.


그가 Rijp 출생이라는게 사실인가?

1. 하멜이 벨테브레를 만났을때 그는 26년간 네덜란드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화란어를 하는데 문제가 있었다. "De Rijp" 이라고 불린 배가 아시 아해안에 있었다. 예를 들면 Nicolaes Coeckebakker는 쇼군이 Shimibara제국의 반란을 억하는 것 을 도와주도록 요청되었다. 그는 해안의 요새에 공세를 퍼붓기 위해 "De Rijp"의 총을 사용할 것 을 요구했다. 쇼군은 수치를 면하기 위해 마지막에 그의 요청을 철수했다. 아마 얀 얀스가 그 배 에 타고 있었다는 걸 의미하지 않을까? 2. 그 당시 별명은 꽤 예외적인 것이었다. 관습상 어떤 이에게 이름을 지을 때는 아버지의 직업이나 그가 태어나 곳의 이름을 땄는데 예를 들면 Jan Janszoon (Jan의 아들인 Jan), Jan de Boer (농부인 Jan), Jan van der Bilt (de Bilt 출신)등이었다.
Janszoon은 태어난 지명을 따서 Jansz나 Janse같은 약어로 주로 사용되었다.

3. "Hollandia"배에 대해 Weltevree에 대한 언급은 없으나 Vlaardingen 출신인 Jan Jansz에 대해서는 언급되었다.

4. 1626년에 "Hollandia"란 이름의 배가 두 척 항해 했는데 한 척은 우리의 Jan Janse의 것이었나?

5. 그는 조선에서 그의 존재을 비밀로 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서 Vlaardingen 대신에 그의 동료가 태어난 마을인 De Rijp를 언급했었을 수도 있다.

6. 1654년에 De Rijp에서 발생한 큰 화재로 모든 기록이 소실 되어서 1655년 이후의 세례서에 Weltevree라는 이름은 언급 되어 있지 않았다.

7. 자식이 있었던지 없었던지 간에 그의 부인은 그 당시 관습에 따라 얀이 돌아오지 않아 재혼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네덜란드에 아직 그의 자손들이 남아 있는지 알아 보는 것도 흥미 있을 것이다.

박연이 말한 대로 그가 정말 그였는지 알아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며 그는 아마 모두를 속였을 수도 있다!

최근의 몇몇 정보는 Wim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Pernis출신인 Lijsbet Janse Weltevreen과 1755년 6월 29일 결혼한 Rijsoord (Rijsoord는 그전 1755년 6월 13일에 결혼했었음)는 1791년 9월 2일 Ridderkerk에 묻혔으며 Jan Janse Weltevreen (?)과 Lijdia Cornelisse Block (?)의 딸이 있었다. Vlaardigen쪽에 더 가까운 Lijsbeth의 아버지는 Jan Janse Weltevree의 손자일 수도 있다.

이전으

처음으로

다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