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칼의 항로를 뒤따라서

앞에서 언급했듯이 네델란드 인은 조선의 해안에 최초로 발을 디딘 유럽인이었다. 조선으로 가는 항로는 포르투칼인에 의해 이미 알려져 있었다. 그때는 대 발견의 시대였다. 에스파니아와 포르투칼은 전설의 황금의 섬(엘도라도)을 찾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포르투칼은 당시 세계를 양분하고 있던 에스파니아와의 분쟁을 막기위해 1493년에 조약을 맺었다. 포르투칼이 동쪽을 목표로 한반면 에스파니아는 서쪽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1498년 포르투칼인 바스코 다 가마는 남아프리카의 희망봉 근처에서 동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했다. 그는 화물을 싣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금의 인도로 알려진 Calicut 서부해안에 도착했다. 그리고1502-1503년에 두번째 탐험이 있었다. 1524년 그는 인도에서 최초로 왕의 휘하에 있게 되었다. 한편, 그의 동료인 Alfonso de Albuquerque는 Malakka섬에 도착했다. 

지구는 둥글어서 결국, 에스파니아와 포르투칼은 그들이 1492년 조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분쟁을 겪었다. 1519년, 포르투칼인 Fernao de Magelhaes 는 인도로 향하는 새항로를 찾기위해 에스파니아 기를 단 5척의 배로 서쪽으로 항해했다. 10월 21일 그는 그후 3척의 배와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해협을 가로질러 항해했다. 3개월후 그는 식량과 물부족의 고통을 견디며 태평양을 가로질러 1521년봄 나중에 필리핀이라 불린 군도에 도착했다.

에스파니아도 곧, 희망봉 을 경유해서 필리핀에 도착하기위해 동쪽으로 항해를 계속했다. 16세기경 필리핀에서 온 에스파니아인과 Moluccas에서 온 포르투칼 인은 점점더 북쪽으로 가서 에스파니아인들이 Hermosa, 포르투칼인 들이 Formosa라 불렀던 Tai-oan(대만)을 발견했다. 한동안 에스파니아나 포르투칼은 거기에서 영구 정착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1542년 포르투칼인은 우연히 일본 영해에 닿았고,포르투칼은 일본정부로 부터 Hirado섬에 무역항을 세워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거의 1세기동안 포르투칼은 일본영해로 둘러쌓인 이곳에서 무역을 했다.그러나 그들은 선교활동을 통해 일본에 기독교를 전파하려 했기때문에 데지마(Deshima)섬 으로 쫓겨나 1636년과 1638년 완전히 추방당했다.

Holland 와 Zeeland에서 온 선박들은 처음엔 향료와 동양의 물건들을 포르투칼로부터 수입했다. 그러나 1580년 네덜란드의 80년동안의 긴 독립전쟁으로 포르투칼이 에스파니아 에게 점령당하고, 포르투칼항구에 정박 중이었던 네덜란드 선박은 번번히 압수당했다.네덜란드는 그 물품들을 아시아로부터 직접 회수하라고 강요받았는데 문제는 제대로된 항로를 어떻게 찾느냐 하는것 이었다. 항로를 찾기위해 Haarlem 출신 Jan van Linschotenn은 인도로 향하는 포르투칼인들의 배를 타고 항해했다. 자신이 살던 Enkhuizen으로 돌아온 그는 그가 찾아낸 항로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출판했는데" Reisgheschrift van de Navigatien der Portugaloysers in Orienten " (1595) ( 포르투칼에서 동쪽으로 가는 항해에 관한 문서 )와 " Itenerario, voyage ofte schipvaert van J.H. van Linschoten naar Oost ofte Portugaels Indien" (1596) ( 동인도나 포르투칼령 인도로 가는 항해에 관한 이야기 )가 그것이다.

거의 같은시기에 Cornelis와 Frederik Houtman 형제는 항로와 무역의 가능성 타진 조사를 위해 포르투칼로 갔다. 1595 두형제는 4척의 배와 함께 희망봉 근처에서 인도로 항해하여, 15개월의 항해후 그들은 Java섬에 도착했다. Bantam에서 그들은 최초의 네덜란드 공장을 세웠다. Java에서 Bali 에 도착한후 배 네 척 중 세 척으로 1597년 그들의 고향인 암스텔담으로 돌아갔다.

첫번째 항해는 상업적으로 성공하진 못했으나 Jacob van Neck가 이끈 두번째 원정에서는 많은 화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런 잇따른 아시아와의 성공적인 교역은 수년안에 향료와 동양 물품 무역에 목적을 둔 여러 회사들이 Holland와 Zeeland 에 세워지게 했다. 이 과정에서 이득손실을 이유로 치열한 경쟁을 하게되었고 더우기 많은 사람들이 모험에 대한 열망을 죽음으로써 그 댓가를 치러야했다. 많은 배가 아프리카 해안이나 희망봉에서 동인도로 가는 오랜 여정동안 난파되었다.

모험심이 덜했던 몇몇 네덜란드인들은 초기 포르투칼인들이 만든 지도를 가져와 발행하는 기회를 엿볼 수 있었다. Flanders 태생 이론가로 본명이 Pieter Plancius ( Peter Flatfoot )인 그는 1592년에 Nova et exacta terrarum tabula geographica and hydrographica ( 지리상 새롭고 정확한 항해도 )라는 제목의 지도를 발행했다. Plancius는 자신을 유능한 아마추어로 만들었다. 최초의 전문적인 지도 제작자는 Jansz. Blaeu였는데 그는 덴마크 천문학자인 Tycho Brahe로 부터 수학과 물리학을 배웠으며, 1608년, 여러번 재판되었던 최초의 정밀 해도(海圖)인 Licht der Zeevaart ( 원양항해의 빛 )을 발행했다. 

1596년 암스텔담 태생인 그의 아들 Joan은 손으로 지도를 제작,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기술을 향상시켰는데, Leyden에서 학업을 마친 Joan은 많은 여행을 했고, 아버지의 회사 를 계속 이끌어 1664년과 65년에 Groten Atlas oft Wereltbeschrijving ( 큰 아틀라스, 세계 대지도 묘사 )를 출판했다. 하지만 이 지도책은 네델란드인들이 조선에 머무르기 전 잠시 발행 되었으므로 이 범위에서는 벗어난다.
그동안 회사의 수는 엄청나게 증가했다. 1601년에는 총 65척의 배를 가진 14개의 회사가 있었다. 

에스파이나와 포르투칼 선박들의 싸움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회사간 다툼도 있었다. 이들은 싸움을 원치 않는 상황이었으므로 회사를 합병하려고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Johan van Oldebarneveldt의 제시로 " de Verenigde Nederlands Geoctrooieerde Oostindische Compagnie" ( `네덜란드 연합 특허의 동인도 회사 )가 설립되었다. 대개 VOC( =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라 불린 이 회사는 Staten-General (=네덜란드 의회)로부터 희망봉의 동쪽과 Magelhaes 해협 서쪽에 대한 무역을 계속할 수 있는 특허를 부여 받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통치권을 부여받았다. 이들 중에서는 군대와 군함보유권, 전쟁선포권과 평화 체결권 도 가지고 있었다.

VOC는 공공 유한회사로 설립 시기에 기부된 자금은 6백 50만 길더(네덜란드 화폐단위)였다. VOC는 Amsterdam, Middelburg,Rotterdam, Delft, Hoorn and Enkhuizen에 6개의 사무실을 두고 있었고, 본사는 Amsterdam에 있었다.. Amsterdam은 출자된 자금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었고, Middelburg 가 1/4, 다른 4개의 회사가 각각 1/6씩 가지고 있었다.

선박은 출자된 자금에 비례해서 그 만큼의 방을 갖추고 있었고, 배에는 Heeren XVII (=17인의 귀족들)로 잘 알려진 행정위원회에서 선출된 73명(후에 60명)의 통치자들이 있었다. 경영은 감독위원회하에 있었고, 통치자들처럼 회원이 소유한 적어도 6천길더를 분배했다.

하지만 감독관들이나 감독을 받는 사람들이 주요 참가자 회원들이었기 때문에 이런 감독은 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주요 참가자들은 사무실이 자리잡고 있는 6개 도시 출신의 제한된 통치자 그룹에 속해 있었다. 결과적으로 한쪽이 똑같은 이름을 접하게 되어. 그로 인한 관리자의 권한은 막강하게 되었다.

Voc의 목적은 열대 농작물, 특히 동남아산 향료 무역과 수송이었다.그외에도 차,칠기,비단, 도자기,면직물도 거래했고 이를위해 소위 공장이라는 것이 세워졌다 이것들은 사무실과 창고, 노동자들의 거주지로 된 작은 규모였다. 공장의 경영자는 대부분이 중개상으로 불렸으나 때로는 사장이었다. 그들은 통치자들의 이름으로 주변 나라와 무역을 했다. 

대부분의 중개상들은 식민지를 강화했다.그들 대부분은 방벽을 가지고 있었고 " Nassau "나;" Hollandia ." 라는 요새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식민지에서 VOC는 실제 공포 통치를 실시했는데 ; 야만인(savages) " 우선 원칙이라는 미명하에 궁핍한 삶을 사는 현지인들에 대한 무차별 처벌 원정이 행해졌다. 

VOC가 설립되고 곧이어 에스파니아와 포르투칼은 동인도해에서 차츰 물러나야 했다. 포르투칼은 Timor섬에서만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Ceylon( =스리랑카 )에서의 전쟁은 오래 지속되었고, 1658년 그들은 막연히 네덜란드를 위해 장소를 내어 주어야했다. 

1609년,네덜란드는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1543년 포르투칼이 주둔했던 일본에 도착했다. 네델란드는 Hirado섬에 공장을 세웠고 1641년까지 머물렀다. 

VOC는 흩어진 정착자들 사이에 결속을 다지고 힘을 강화시키기 위해 한 사령관 밑에 통치를 집중 시켰다. 1610년 Pieter Both는 왕좌( 총독공관 ). 로서 Banten 혹은 Bantam과 West-Java의 최초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외에 그는 인도회의라 불린 5명으로 구성된 ( Raad ),위원회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행정상 업무에서 총독은 정규, 비정규 고문들 (= Raden = 복수 Raad(=회의) ) 의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높은 정부'를 형성 했고 게다가 업무분야에서 최고로 임명된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는 두 '우두머리상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1614년, 우두머리 상인들은 사무실을 Geraard Reijnst에게 넘겨줬다. 그는 1614년부터 1618년까지 총독 이었다. 그해에 그는 동남아시아 VOC의 실제 설립자인 Jan Pieterszoon Coen에 게 계승하게 되는데,Coen은 1587년 Hoorn에서 태어나 1607년 VOC 재직중에 보조 상인으로 인도로 떠났다. 그는 빠른 성공을 거듭해서 1614년 국장, 1618년에 총독이 되었다. 1619년에는 Jacatra를 정복했다. 폐허가 된 도시에서 그는 정부자리가 들어설 새 도시를 건설했다. 그는 그 도시를 자신이 태어난 곳의 이름을 따서 New-Hoorn이라 불 렀으나. Heeren XVII Batavia 가 Batavia로 바꾸었다. 

Jan Pieterszoon Coen은 유능한 행정가이자 창립자였다. 그는 VOC내부의 부정과 성공적으로 맞서 싸웠고 과감한 행동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특히, Bandanese에 맞선 그의 행동은 악명 높았다. Bandanese는 그 동안에 머물러 있던 영국이 정한 계약을 지키지 않았다. 이런 유혈책을 통해 Coen은 낮은 가격에 육두구와 향미료의 세계 무역을 VOC의 손에 넣은데 성공했다.

1623년 Coen은 사임을 표명하고, VOC 구조의 완벽한 재정비를 제안했던 Holland로 돌아갔다. 이 제안은 자유무역과 식민화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동쪽과 본국사이의 무역에 대해 VOC가 독점을 고수한 반면 그는 사람들의 식민지 정착과 자유롭고 개인적인 원양무역에 대해 찬성 했다.

행정관들은 이런 제안으로 많은 증오를 받았다. 그들은 동인도와 본국사이 뿐만 아니라 archipelago 자체에서도 VOC의 독점유지를 강력히 선호했다. 개인에 대한 무역을 허가하면서 그들은 통제력을 상실했다고 느꼈다.그러나 그것은 단지 기우에 불과했다. 식민지정책은 그들에게도 별로 유효하지 못했다. 그들은 가능한 인도에 머무르는 유럽인들의 수를 최소화하길 원했다. VOC의 몇몇 종사자들( 종사자라 함은 고용인의 개념에서 사용됨 )만이 archipelage와 공장에 머무르는것이 허용되었다.

식민지화는 엄청난 투자를 내포하고 있다.Coen의 논쟁 "de cost gaet voor de baet uyt" (이익을 얻기위해서는 누군가가 먼저 투자 해야한다.) 은 그들에겐 흥미없는 것이었다. 행정관들은 정찰가에 대한 물품의 배급이 현지 관계자들과의 계약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기존 제도를 선호하는 입장이었다. 이런 계약은 공정하게 이행되지 못했다. 그 결과 유실 거래라 불린 많은 남용이 저질러 졌는데, 예를 들면 VOC의 독점법에 반대하는 VOC 종사자들에 의한 개인 거래가 그것이다. 원래 이 거래는 홍수로 유실된 향료를 판매함으로써 존재했었는데 나중에는 몇 가지 방법으로 부가된 상품으로 구성 되었다.게다가 VOC 종사자들은 계약을 수행하는 동안 엄청난 몫을 요구했다. 그들은 또한 스스로 상품을 쓰기도 했다. 그들은 spillage나 lace라 불린 쇠퇴해 가거나 손실 물품에 대해 15%까지 삭감을 주장하기도 했다.

VOC의 이익은 주로 종사자들의 부당행위로 지불된 비용으로 만들어졌고 일부는 현지인들에 대한 비용이었다. 현지인들에 대해 Clove는 파운드 당 3 " stuivers "(1 stuiver = 1 길드의 1/20)를 지불했고, 수송으로 인해 5 " stuivers " 였던 것이 독점 덕택에 75 " stuivers " 에 팔릴수 있었다. VOC가 이익의 18% ,1642년에는 심지어 50%를 배당금으로 지불할수 있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동안 에스파니아는 대만에 확고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일본에게는 눈에 가시였다. 일본은 에스파니아와 포르투칼이 카톨릭교를 전파시키려고 하는 수 많은 수도사들을 배에 숨겼기 때문에 그들을 몹시 싫어했다. 일본은 이것을 국가적인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일본이 네덜란드에게 에스파니아를 대만에서 물러나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도 이 때문이다. 네델란드는 처음에는 그럴 의도가 없었으나 일본이 북쪽에 금광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제안하자 갑자기 주목하게 되었다. 

해상과 육상에서의 한차례 치열한 전투가 있고 난후 에스파니아는 철수당하게 되었다. 1624년에 " Zeelandia "요새가 세워지고 같은 해에 사령관이 임명되었다. 같은 해 Coen 사령관의 임기가 유임되었고, 그는 더 많은 자금과 인원, 관할권을 요구한 후 인도로 떠났다. 

1627년 Batavia (지금의 자카르타) 에 도착한 Coen은 그의 엄청난 권력을 이용해서 식민지화에 대한 계획 일부를 수행해 나갔다. 현지인들은 Hongi-campaigns이라는 징벌대에 의해 전멸되었고, Coen은 전 VOC 종사자들에게 버려진 향료 재배지를 사용하게 해주었다. 이것은 정향나무를 재배하는 노예들의 도움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결국, 견과류와 향미료는 정찰가로 VOC에 보내게 되었다. 

1628년 Batavia 는 Mataram군에게 포위공격을 받았고 1629년 두번째의 맹공으로 Coen은 사망하게 되지만 그의 죽음은 아마도 콜레라때문이 었을 것이다. Coen은 후세에 아주 번창하게 된 매우 탄탄히 잘 정비된 VOC를 남겨두고 떠났다. 

거의 100년이 지난후 포르투칼은 일본정부에 의해 쫓겨났고 3년후 네덜란드는 일본정부로부터 Hirado섬에 있는 공장을 포르투칼을 위해 처음 세워진 나가사끼만의 인공섬인 데지마(Deshima) 섬으로 옮길 것을 명령받았다. 

인공섬인 Deshima와 Nagasaki만. .1헥타르에 해당하는 이곳에서 하멜과 그의 일행은 1666년 9월 14일부터 1667년 10월 23일까지 머물렀고, 하멜은 여기에서 그의 표류기(Journael) 를 썼다. 실크위에 그린 Kuwahara작(그림을 클릭하면 다른 지도를 볼 수 있음.) 

1636년에는 Anthony van Diemen 총독이 되었다. Van Diemen은 암스텔담에서 파산한 상인 이었는데 VOC에서는 파산당한 사람을 고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Thomas Meeuwisz van Utrecht란 필명으로 1618년에 인도로 떠났다. 그의 거짓이 발각되었을때 Jan Pietersz Coen은 그를 보호해 주어 그의 경력에 해를 입히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1623년 Van Diemen은 일등상인, 1625년에는 인도의 고문을 거쳐 1636년에는 총독이 되었다.

  그가 통치한 1645년 까지 Abel Tasman에서부터 항해는 계속되어 1642년 그가 Van Diemensland에게 세례를 배푼 Tasmania를 발견했고 1643년에는 Statenland라 부른 New Zealand를,1644년에는 New-Holland라는 이름과 연관지은 Austalia를 발견했다.
 
 네덜란드인이 조선에 머무르는 동안 Joan Maatsuyker가 총독으로 있었는데 그는 1606년에 암스텔담에서 태어나 1636년에 VOC에 종사해서 Batavia 에서 공정위원회의 비서가 되었고 1641년에는 네덜란드-인도 특별고문이 되었다. 

그는 현존하는 포고령과 성명서, Heeren XVII 와 총독의 칙령을 1848년 까지 네덜란드-인도 사이의 사법 체계의 기초가 되었던 Batavia 법령에 적용시키라는 Van Diemen의 명령으로 유명해졌다. 1646년부터 1650년까지 Maetsuyker는 Ceylon의 장관이었고 1653년부터 1678년까지 총독이었다. 이 긴 세월동안 누구도 이 자리를 넘보지 못했다. 그의 통치기간동안 VOC 는 그 세력을 자바와 수마트라,Celebes까지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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